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사쓰에이 전쟁 (문단 편집) == 결과 == 영국 해군은 1척 대파, 2척 중파의 피해와 쿠퍼 제독이 승선하고 있었던 기함 HMS Euryalus의 함장과 부함장을 포함해 13명의 사망자와 50명의 부상자를 냈다. 영국 함대 측은 설마 전쟁으로 번질 줄을 예상하지 못해서 대포에는 포탄을 장전하고 있지 않았고, 탄약고 문 앞에는 에도 막부로부터 받은 배상금을 쌓아두었기에 반격에 2시간 이상이 걸렸다. 사쓰마 번은 포대 10개가 전부 초토화 되어 말 그대로 해안 포대 전체가 괴멸 해버렸으나 흙더미와 석벽으로 엄폐받는 해안포대의 특성상 인명피해 자체는 비전투원 5~8명 및 부상자 18명 정도로 상대적으로 경미할 수 있었다.[* 일반 백성들이 함포 사격이 있을 줄 알고, 미리 대부분 사정거리 밖으로 벗어나 산 뒤에 숨어있던 것이 피해를 줄이는데 일조했다.] 또한 영국 함대의 무차별 포격으로 인해 관공서와 양학연구소,서양식 무기공장 등이 몽땅 불타며 도시는 불바다가 되었고, 막대한 금전적 손실을 입었다. 게다가 당시 사쓰마 해군력의 핵심이던 서양에게 구매한 증기선 3척도 소실되어 버렸다. 당시 서양 열강들은 세계최강이라는 [[영국 해군]]이 겨우 일본의 일개 지방정부를 상대로 전투를 포기하고 퇴각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으며, [[미국]]의 [[뉴욕타임스]]는 1863년 10월 4일호에서 일본이 의외로 서구의 무기와 전술에 익숙하니 그 전력을 만만하게 봐선 안 된다라는 평을 남겼다. 영국에서는 민간인 거주지역까지 무차별 포격을 한 것에 대해 비난의 목소리가 높았다. [[빅토리아 여왕]]까지 나서서 쿠퍼 제독을 질책했다. 전투 이후 사쓰마와 영국은 오히려 서로를 높이 평가했다. 강화조약에서 사츠마 측은 영국으로부터 군함과 무기를 구입한다는 조건으로 배상금을 지불하기로 제안했다. 실은 전쟁후에 영국군의 포탄을 보고 사츠마번은 놀랐다. 자신들이 쓰던 둥근탄환이 아니라 길쭉한 탄환으로 사정거리가 4배가 넘는 4킬로미터가 날아가는 최신식 [[암스트롱포]]였다. 이에 영국과 싸울게 아니라 손을 잡아야한다는 여론이 조성됐다. 영국도 원래부터 원하던 것이 통상이었고, 교역의 대상을 막부 뿐만 아니라 여러 번을 상대하면 보다 많은 이익을 얻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고, 또 경쟁국가였던 친막부 성향의 [[프랑스]]를 견제하기 위한 일환으로 사쓰마와 조약을 맺고 친밀한 협조 관계가 된다. 그리고 사쓰마 번은 막부로부터 2만 5천 파운드의 차관을 빌려 영국에게 배상하여 갈등을 종결 지었다. 이후 본래 양이론자가 아닌 히사미츠는 무모한 양이를 하지말 것을 번사들에게 명하고 교역을 통한 부국강병 정책을 추진했다. 1864년에 서양에 대한 지식을 배우는 개성소(開成所)를 개설[* [[존 만지로]]가 교수로 참여했다.], 다음해인 1865년에는 번의 지원 하에 20명의 장학생을 선발해 영국으로 보냈다. 1867년에는 네덜란드에서 [[증기기관]]을 들여와 증기선을 만들기 위한 부품을 만드는 서양식 공장인 '집성관(集成館)기계공장'과 방적소(紡績所)를 설립하고, 서양의 기술을 지도하는 영국인 기술자들이 머무는 이인관(異人館)도 건축했다. 여담으로 [[쓰시마 해전]]의 영웅 [[도고 헤이하치로]]가 당시 사쓰마의 해안포대 병사로 참전했었다고 한다. [[야마모토 곤노효에]]도 참전했다. 그리고 일본 최초의 내무경이 되는 [[오쿠보 도시미치]]도 이 전쟁에 참전해서 싸웠다. 행정가 이미지로 전쟁과는 거리가 있는 것으로 여겨지지만 그는 원래 하급 무사 계급 출신이다. [[사이고 주도]]는 수박 판매를 가장한 결사대에 자원했다. 반면 [[사이고 다카모리]]는 오키노에라부 섬에서 유배 생활을 하고 있어서 참전하지 못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